『프랑스 철학과 문학비평』, 한국프랑스철학회


『프랑스 철학과 문학비평』은 프랑스의 유명한 철학자들의 문학론에 대해서 설명한 책이다. 각각의 철학자에 대해 권위자라고 할 수 있는 학자들이 한명씩 맡아 그들의 문예이론에 대해 설명했다. 그렇다보니 각 챕터마다 편차가 크다. 그렇지만 프랑스 철학자들의 문학론을 간단히 접할 수 있어 이제 갓 프랑스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책 같다.


섬세한 전기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발자크의 습작 시잘, 그러니까 아직 진정한 소설가로 불리기 이전 무렵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스무살짜리는 자기가 무엇이고 앞으로 무엇이 되려는지 아직 분명한 생각이 없었다. 철학자인지, 시인인지, 극작가인지, 아니면 학자인지. 어디를 향할지 모른 채 다만 힘만을 느끼고 있었다. (……) 발자크라는 이름을 세상에 알릴 작품이 철학적 체계인가, 아니면 교외지역의 오페라 대본인가, 낭만적 서사시인가, 아니면 소설인가?” (슈테판 츠바이크,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 안인희 옮김, 푸른숲, 1998, p.64~65) 청년 발자크의 두뇌는 문학만의 소유가 아니었다. 발자크라는 용광로 안에는 어떤 생명체로 펼쳐질지 모르는 복잡한 조직체가 누리는 은밀한 밤처럼, ‘철학’과 ‘문학’이 함께 들끓고 있었던 것이다. (p.9)

라캉의 문학론
라캉에 의하면 무의식은 상징계에 존재하며, 억압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 아니라 바로 시니피앙이다. 라캉은 무의식을 ‘알려지지 않은 지식’의, 혹은 ‘주체의 의식을 벗어나는 말’의 효과로 정의한다. 상징계는 애초 의미를 갖지 못한 시니피앙에 의해 구성될 뿐 아니라, 주체의 경험에 선행하여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체는 자신의 욕구를 언어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데 말이 되풀이될수록 욕구와 요구의 간격은 커지게 된다. 헤겔은 이미 『정신현상학』에서, 언어란 내가 의도한 것에 도달하지 못하고 그것을 즉각 뒤집어 세계안의 타자처럼 되돌려준다는 것을 강조했다. (p.20)

인간이 일단 언어의 세계로 들어가면 원초적 만족의 기억은 반복 될 수 없다. 상징계 자체가 사물의 대체, 즉 ‘말은 사물의 살해이다’라는 논리 위에서 구축되기 때문이다.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 우리는 세계에 대한 직접적 접촉대신 간접적인 표상과 의미를 통해 세상을 보게 된다. 언어화 과정에서 무언가를 잃어버린 느낌은 인간에게 최초의 만족과 대상을 상기시키고 그것을 좇게 만든다. (p.24)

텍스트는 독자를 끊임없이 애매성과 모호성의 포로로 만들면서 재해석을 통해 욕망의 실체를 보여줄 것처럼 독자를 끌어당기는 미끼 역할을 한다. (p.25)

욕망의 대상은 항상 상징계 속에서 찾아질 수밖에 없는데 상징계는 상호주체성의 관계를 전제로 한다. 상호주체성의 관계에서 너와 나의 말은 욕망의 진정한 대상을 지시할 수 없다. 욕망은 주체나 의미에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문자 사이의 틈에서 언뜻언뜻 자신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p.32)

사르트르의 문학론
정신의 모든 작품들은 그 자체 속에 이 작품들이 목표로 삼고 있는 독자의 모습을 포함하고 있다. (p.69)

레비나스의 문학론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정식이 예술가를 인간으로서의 의무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예술가에게 겉치레에 불과한 귀족적 기품을 보장해주는 한, 이 정식은 비도덕적인 것이다. (p.91)

블랑쇼의 문학론
‘내’가 공간으로 열리는 탈존ex-sistance 그리고 타인으로 열리는 의존ex-position (p.108)

메플로-퐁티의 문학론
알랭 로브-그리예는 「누보로망과 새로운 인간」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은 입장을 밝히고 있다.
첫째, 누보로망은 이론이 아니라 하나의 탐구이다. 말자하면 소설에 정형화된 양식이 있다는 일반 통념을 부정한다.
둘째, 누보로망은 소설 장르의 항구적 발전을 계속하게 만든다.
셋째, 누보로망은 인간에 대한 관심, 곧 세계 속에 처한 인간의 상황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넷째, 누보로망은 ‘온전한 의미’의 주관성을 지향한다. 여기 있는 사람, 그리고 지금 존재하는 사람이 소설 속 화자인 것이다.
다섯째, 누보로망은 성실한 모든 이에게 호소하고 있다. 우리 자신의 고유한 기억력, 결코 연대기 순이 아닌 우리 고유의 회상을 드러내는 것이 보다 현명하지 않을까? 성실한 모든 이가 만나는 이름 모를 사람들을 소설에서도 만나는 것이다.
여섯째, 누보로망은 이미 형성된 의미를 제안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작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참여는 오직 문학을 통해서라고 로브-그리예는 천명하고 있다. (p.147)

이 세계란 본 것과 보지 않은 것 및 말한 것과 말하지 않은 것의 ‘차이’에 따라 명확해진다는 말이므로 결국 보지 않는 것과 말하지 않은 것이 바로 ‘양자 사이’의 차이를 지칭하게 된다. 요컨대 ‘저자됨’이란 다름 아니라 본 것과 보지 않은 것 사이 및 말한 것과 말하지 않은 것 사이에 내재한 ‘차이 자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므로 저자의 문체는 바로 이러한 은유적 시각이요, 이 균열écart 자체이며, “전부가 아닌 양식이며, 따라서 하나부터 열까지 그 어느 것도 완전하게 만들어지지는 않았을지라도 창작은 가능한 것이다.” (p.150)

부조리l'absurde 는 스스로 붕괴된다. 이 세계가 부조리하다고 말하는 것은 여전히 하나의 이성만을 맹신하려 고집함과 같은 것이다. (p.154)

그 누구도 역사를 만들지는 못하며, 풀잎이 돋아나는 것을 보지 못함과 같이 아무도 역사의 생성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p.154)

리쾨르의 문학론
남은 문제는 그 “글쓰기”를 누가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각자의 삶에 가져가느냐이다. 이런 점에서 리쾨르가 문학작품의 온전한 의미는 “텍스트에 의하여 투사된 세계와 독자의 삶의 세계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획득된다고 말하는 것은 대단히 시사적이다. (p.203)

-  한국프랑스철학회,『프랑스 철학과 문학비평』, 문학과지성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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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랑스 철학과 문학이라.. 2009/04/21 13:05 #

    한동안 푹 빠져들었던 베르베르의 소설들 몇년째 책장에 꽂혀만 있는 사르트르의 '얼굴' 개념의 표피만 겨우 이해한 레비나스의 철학 최근 읽게 된 기욤 뮈소의 파리에서의 2주 동안 읽은, 2008 노벨문학상 수상작 르 클레지오의 이들 사이에 존재하고 있을 듯한 '프랑스'라는 연결고리... more

덧글

  • 프리스티 2009/12/05 20:13 # 답글

    이 책 서문에 보면 서강대 철학과 대학원생 김광철군의 도움으로~ 라는 부분이 있는데 그 김광철님이 책마을 명예의 전당에 있는 그 김광철님인 것 같더군요. 허허.
  • JNAR 2009/12/06 07:24 #

    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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